
휴가지 별장 앞 진입로에 낯선 가족 넷이 서 있습니다. 엄마, 아빠, 딸, 아들. 불을 켜자 드러나는 얼굴은 우리 가족과 똑같아요. 아이 둘을 키우는 아빠로서, 이 장면만큼 등골이 서늘했던 오프닝은 없었습니다.
겟 아웃을 보고 나서 조던 필이라는 감독 이름을 메모해뒀어요. 그래서 두 번째 작품 어스는 기대를 꽤 높게 잡고 봤는데,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놀랐습니다.
영화 기본 정보
제목: 어스 (Us)
국내 개봉: 2019년 3월 27일
감독: 조던 필
출연: 루피타 뇽오, 윈스턴 듀크, 엘리자베스 모스
러닝타임: 116분
관람 등급: 15세 이상
관람 정보: 19년도에 영화가 좋다에서 개봉한다는 것을 보고, 아내와 같이 봤어요.
나의 별점: ★★★☆☆
영상 출처: 유니버설픽쳐스 공식 유튜브
※ 아래부터는 결말과 반전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울 보기가 싫어진 이유
영화는 1986년 산타크루즈 해변 놀이공원에서 시작합니다. 어린 애들레이드가 혼자 거울의 방에 들어갔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아이와 마주치죠. 그리고 수십 년 뒤, 어른이 된 애들레이드는 남편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과 함께 그 해변 근처로 휴가를 옵니다.
붉은 작업복을 입고 황금빛 가위를 든 도플갱어들이 무서웠던 건 생김새 때문이 아니었어요.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얼굴인데 눈을 마주치는 방식, 웃는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되더라고요. 루피타 뇽오가 쉰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꺼내는 장면에서는 보는 저까지 몸이 굳었고, 그 뒤로 한동안 밤에 거울 보는 게 이상하게 꺼려졌습니다.
아빠 게이브가 자꾸 눈에 밟혔다
보트를 자랑하고 아재 개그를 던지는 게이브가 꼭 저 같아서 웃다가, 정작 가족이 위험해지자 허둥대는 모습에서는 웃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저라면 저 순간 아이들 앞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게이브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먼저 나서 보지만 금세 다치고, 오히려 아내와 아이들이 가족을 지켜냅니다. 처음엔 그 모습이 한심해 보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가장 현실적인 아빠의 모습 같았어요. 저도 그날 밤 아이들 방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잤습니다.
가위, 토끼, 그리고 11:11
이 영화는 곳곳에 단서를 숨겨둡니다. 황금빛 가위는 종이 한 장을 둘로 가르듯 같은 몸에서 갈라진 두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지하에 가득한 토끼는 갇혀 사는 이들의 처지를 보여줘요. 초반 노숙자의 팻말에 적힌 예레미야 11장 11절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예고하는 구절이고, 결말에서 도플갱어들이 손을 잡고 늘어서는 장면은 1986년 미국에서 실제로 수백만 명이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든 자선 행사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를 그대로 비튼 장면입니다. 처음 볼 땐 그냥 섬뜩한 소품이었던 것들이 다시 보면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져요.
이틀 뒤 다시 봤을 때
처음 볼 때 저는 내내 애들레이드 편이었습니다. 가족을 지키려고 싸우는 엄마를 응원하며 손에 힘을 주고 봤는데, 결말에서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어요. 그날 밤 거울의 방에서 나온 아이는 그림자 쪽이었습니다. 제가 줄곧 응원한 그 엄마가 사실은 남의 삶을 빼앗아 올라온 쪽이었던 거죠.
그래서 이틀 뒤에 다시 봤습니다. 두 번째가 훨씬 무서웠어요. 어린 애들레이드가 한동안 말을 잃었던 것, 처음 가보는 지하를 망설임 없이 내려가던 것, 막내 제이슨이 엄마를 미묘하게 낯설어하던 장면들이 전부 단서였거든요. 한 번 알고 나면 첫 장면부터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
제목 Us는 우리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뜻하기도 합니다. 지상 사람들이 햇빛을 누리는 동안 지하에서 같은 삶을 억지로 따라 살아야 했던 존재들. 우리가 외면해온 또 다른 우리라고 읽으면, 이 공포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아쉬웠던 점
설정에 허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복제된 존재가 낳은 아이에게 또 그림자가 있다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헐거워요. 다만 저는 이 영화가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지보다 무엇을 말하려는지가 중심인 영화라고 봅니다.
중반 이후 지하 세계에 대한 설명이 대사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부분은 조금 친절하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그림자들이 왜 생겼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애들레이드의 그림자가 긴 독백으로 풀어내는데, 앞부분의 섬뜩한 분위기에 비해 갑자기 설명이 많아지는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장면이라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놓치기 쉽습니다. 저는 두 번째 볼 때에서야 그 독백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어요.
겟 아웃과 비교하면
겟 아웃이 인종차별이라는 분명한 대상을 겨눈다면, 어스는 더 넓고 모호한 불안을 다룹니다. 그래서 처음 볼 땐 겟 아웃이 더 직관적으로 무섭고, 두 번째 볼 땐 어스가 훨씬 깊게 느껴졌어요. 어느 쪽을 먼저 봐도 괜찮지만, 둘 다 꼭 두 번씩 보시길 권합니다.
마치며
선과 악의 경계가 이렇게까지 흐려지는 결말은 흔치 않습니다. 억눌린 것은 언젠가 반드시 올라온다는 경고를 공포라는 형식 안에 이렇게 촘촘히 박아둔 영화도요. 두 번째 보실 때는 애들레이드가 처음부터 어떻게 행동하는지, 제이슨이 엄마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집중해보세요.
이 글을 쓰며 유튜버 무비쇼크 님의 어스 리뷰 영상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