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되면 더 자유로워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 살 딸과 두 살 아들을 키우는 아빠가 되고 나서야 정반대라는 걸 깨달았어요. 애니메이션 어린왕자는 계획표 속에 갇힌 한 소녀와, 자기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어른 어린 왕자를 통해 우리가 자라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보는 내내 아직 어린 우리 아이들의 앞날이 겹쳐 보였어요.
영화 기본 정보
제목: 어린왕자 (The Little Prince)
국내 개봉: 2015년 12월 23일
감독: 마크 오스본
원작: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음악: 한스 짐머, 리처드 하비
관람 정보: 집에서 넷플릭스로
나의 별점: ★★★★★
영상 출처: Warner Bros. ME
※ 아래에는 줄거리와 결말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건넨 인생 계획표
영화는 엄마가 딸에게 빼곡한 인생 계획표를 건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무엇을 공부하고, 몇 년 뒤 어떤 학교에 들어갈지까지 칸칸이 정해져 있죠. 처음엔 과장된 설정이라 웃음이 나왔는데, 곧이어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우리 주변의 풍경과 너무 닮아 있었거든요. 저희 딸은 이제 세 살인데, 벌써 주변에서 영어 노출은 언제부터 하냐, 문화센터는 어디 다니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어린이집 단톡방에서 또래 아이가 한글을 읽는다는 글을 보고 괜히 조급해져서, 아직 노는 게 전부여야 할 아이에게 낱말 카드를 들이밀었던 날도 있었어요. 영화 속 엄마의 계획표를 보며 웃다가, 그 계획표의 첫 장을 제가 이미 쓰기 시작한 건 아닌가 싶어 멈칫했습니다.
그런 소녀가 옆집 괴짜 할아버지를 만나 처음으로 웃고 뛰어노는 장면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사막에 불시착했던 비행사이고, 그곳에서 만난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소녀에게 들려줘요. 억눌렸던 아이다움이 되살아나는 그 짧은 순간이, 계획표로 채워진 수많은 장면보다 훨씬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건물 청소부가 된 어린 왕자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은 어른이 된 어린 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은 채 어른들의 도시에서 건물 청소부로 일하며, 상사의 눈치를 보고 해고를 걱정하며 살고 있어요. 원작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간 것으로 암시되는데, 애니메이션은 그 뒷이야기를 이렇게 뒤집어 버립니다.
장미, 여우, 그리고 비행사 할아버지. 어린 왕자가 잊어버린 것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실이었어요. 그걸 잊어버린 왕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 더 아팠습니다. 아직 세 살, 두 살이라 함께 보기엔 이르지만, 딸이 초등학생이 되면 꼭 같이 보고 싶습니다. 그때 딸은 소녀와 할아버지의 우정에 빠져들 테고, 저는 아마 또 어른이 된 어린 왕자 장면에서 혼자 울컥하겠죠. 영화가 끝나면 딸에게 "너의 별에는 뭐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물어보고 싶어요. 그 대답을 오래 기억해두었다가, 딸이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들려주고 싶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남는 음악
이 영화를 말할 때 음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스 짐머와 리처드 하비가 음악을 맡았고, 프랑스 가수 카미유의 노래가 곳곳에 흐르는데, 가사를 다 알아듣지 못해도 마음이 먼저 움직여요. 저는 한동안 출퇴근길에 이 OST를 틀어놓고 다녔는데, 음악만 들어도 작은 별 위에 서 있는 어린 왕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달라진 것
영화를 본 다음 날, 딸이 블록을 쌓다 말고 거실을 빙글빙글 도는 걸 보고 예전처럼 "이거 해볼까?" 하고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옆에서 같이 돌았어요. 목적 없이 노는 시간이 이 나이 아이에게는 가장 중요한 공부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퇴근 후 한 시간은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두고, 두 아이가 하자는 대로만 놀아주려고 해요.
아쉬웠던 점
후반부 어른들의 별로 떠나는 모험 장면은 앞부분의 잔잔한 분위기와 결이 달라서 조금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회색 도시와 거대한 기계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모험 활극처럼 바뀌는데, 원작의 조용한 정서를 좋아했던 분이라면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아요. 또 어린아이와 함께 보기에는 이 후반부가 다소 어둡고 무서울 수 있어서, 아이 나이에 따라 함께 볼지 미리 생각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와 함께 봐도 될까
저희 아이들은 아직 세 살, 두 살이라 함께 보기엔 이르지만, 초등학생 정도라면 같이 보기 좋은 영화예요. 다만 저는 오히려 다 큰 어른에게 더 깊이 꽂히는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아이는 소녀와 할아버지의 우정에 집중하고, 어른은 꿈을 잊어버린 왕자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니까요. 두 세대가 각자 다른 높이에서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아빠의 마음으로 본 또 다른 영화가 궁금하다면 좀비딸 후기도 함께 읽어보세요.
마치며
어른이 된 어린 왕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 이유 없이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한 번쯤 보시길 권합니다. 음악을 먼저 틀어놓고 시작하면 더 좋아요. 음악이 이미 마음의 문을 절반쯤 열어줄 테니까요.
이 글을 쓰며 유튜버 미들뻔 님의 리뷰 영상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