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보면서 원작 만화책까지 정주행하게 된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저한테는 『슬램덩크』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바로 『체인소맨 레제편』이었고요. 넷플릭스에서 TV판 오프닝 KICK BACK 한 곡에 이끌려 보기 시작했는데, 극장판 개봉 소식을 듣고 만화책 전권을 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액션이고, 액션인 줄 알았는데 감정이었습니다
극장판 전반부는 상당히 잔잔합니다. 덴지와 레제가 처음 만나는 공중전화 부스 장면부터, 학교 탐험, 수영장 씬까지 흐름이 로맨스물처럼 이어집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이 속도감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무 좋은 게 계속 나오면 뒤에 반드시 터진다는 걸 원작을 읽은 사람은 알고 있으니까요.
레제라는 캐릭터는 폭탄의 악마(Bomb Devil)가 인간의 몸에 깃든 존재입니다. 여기서 폭탄의 악마란, 『체인소맨』의 세계관에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대상일수록 해당 악마의 힘이 강해지는 설정에 따라 탄생한 상위 악마 중 하나입니다. 쉽게 말해, 폭발물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클수록 이 악마는 강해집니다. 총의 악마나 폭탄의 악마가 강력한 반면, 닭이나 해삼의 악마가 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설정이 영리한 건, 독자 입장에서 '다음엔 어떤 악마가 나올까'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점입니다. 저도 이 때문에 정주행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레제를 연기한 우에다 레이나의 보컬 톤은 캐릭터와 찰떡같이 맞아 들어갔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작은 동작 하나에도 생동감이 실렸고, 앞머리가 세 갈래로 갈라진 디자인이 물리적으로 왜 그렇게 생겼는지를 영상으로 보는 순간 바로 납득이 됐습니다. 이건 정지된 컷으로는 전달이 안 되는 감각입니다.
후반부로 넘어가면 작품의 온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레제의 폭탄 공격과 덴지의 체인소 능력이 충돌하는 전투씬은 이펙트 밀도와 카메라 워크 수준이 상당합니다. 도심 전체를 비추는 롱샷(long shot, 피사체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배경과 함께 담는 촬영 기법)을 활용해 생활감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폭격전이 벌어진다는 현실감을 줬습니다. 원작 만화가 칸의 배치와 양면 펼침 구성으로 영화적 움직임을 만들어냈다면, 극장판은 음향과 이펙트와 카메라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제 경우엔 액션씬 중간중간 삽입된 BGM이 긴박함을 배가시켜, 숨 쉬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펙트가 과밀한 컷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되는 건지 시각적으로 추적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집중력이 한 번씩 끊기는 느낌이랄까요. 원작을 미리 읽어두지 않았다면 흐름을 놓쳤을 장면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레제편이 극장판으로 나온 이유가 있습니다
레제 파트는 『체인소맨』 전체 서사 중에서도 비교적 완결된 구조를 가진 서브 스토리입니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감정선도 단순하지 않으면서 과잉되지 않게 정리됩니다. 이런 이유로 뚝 떼내어 한 편의 극장판으로 구성하기에 최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반면 이후에 이어지는 산타클로스 자객 편이나 판시 파트는 후지모토 타츠키 특유의 예측 불가한 전개가 핵심이라 극장판 포맷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 TV판 예습을 하고 보면 마키마의 행동과 덴지의 심리 변화가 훨씬 선명하게 읽힙니다
- 원작을 보지 않은 상태로도 로맨스→액션의 흐름 자체는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 다만 레제의 속내와 마키마가 레제를 처리한 이유는 원작 맥락을 알아야 무게감이 달리 느껴집니다
- 시간이 없다면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약 4시간 분량의 TV판 총집편만 보고 가도 충분합니다
OST 하나가 작품 전체 여운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이번 극장판을 세 번 봤습니다. 레제 앓이에서 빠져나오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고 솔직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여운의 상당 부분은 OST에서 왔습니다.
TV판 오프닝 KICK BACK으로 이름을 알린 요네즈 켄시가 이번 극장판에서도 주제곡을 맡았습니다. 오프닝 곡 '아이리스 아웃(Iris Out)'은 덴지가 마키마와 레제 사이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과부하 상태를 가사와 편곡으로 정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아이리스 아웃(Iris Out)이란 원래 영화 편집 용어로, 화면이 원형으로 좁아지며 암전되는 장면 전환 기법을 가리킵니다. 이 용어를 곡 제목으로 쓴 것 자체가 레제의 퇴장을 암시합니다. 저는 일부러 극장 상영 전까지 이 곡을 참았다가 처음 들었는데, 덕분에 오프닝 크레딧부터 감정이 확 당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엔딩 곡 '제인도우(Jane Doe)'는 완전히 다른 결의 곡입니다. 제인도우(Jane Doe)란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을 가리키는 영미권 표현으로, 법의학이나 수사 맥락에서 자주 씁니다. 이 단어를 엔딩 제목으로 쓴 건, 레제라는 인물이 결국 어떤 존재로 남는지를 함축합니다. '계속 보고 있어'라는 가사가 덴지의 등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는 레제의 마지막 시선과 겹치면서, 극장을 나오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 정도로 엔딩곡이 서사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원작 52화의 제목은 '시련꽃 체인소'입니다. 덴지는 레제가 자신을 찼다고 생각하며 홀로 그 자리에 남지만, 실제로 레제는 그 순간 덴지의 등을 보며 숨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이 엇갈림이 원작의 핵심 감정인데, 극장판은 레제의 속내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이 장면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설명하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제가 직접 느꼈습니다.
참고로 요네즈 켄시는 이번 극장판 특전 책자에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현지 배포분에는 후지모토 타츠키 선생의 인터뷰와 제작 자료도 함께 담겼다고 하는데, 국내에도 이런 특전이 정식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요네즈 켄시의 음악 활동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출처: Sony Music Japan 공식 아티스트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산업 전반의 흐름을 보면, 일본 문화청이 발표한 미디어 예술 관련 자료에 따르면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TV 시리즈 대비 제작비와 연출 밀도 모두에서 상위 포맷으로 분류됩니다(출처: 일본 문화청 미디어 예술 플라자). 레제편이 TV판이 아닌 극장판으로 기획된 배경에는 이런 포맷의 물리적 조건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폭발이라는 모티브는 사운드와 이펙트가 최대치로 작동하는 극장 환경에서 가장 잘 살아납니다.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건 체감이 다릅니다. 이건 제가 세 번 본 후에야 확신한 부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체인소맨 TV판 안 보고 레제편 바로 봐도 되나요?
A. 로맨스와 액션의 기본 흐름은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다만 마키마가 레제를 처리하는 이유, 덴지가 공안을 배반하려 한 맥락은 TV판 배경 없이는 무게감이 반감됩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넷플릭스에 있는 4시간짜리 TV판 총집편을 먼저 보고 가는 걸 권합니다. 저는 총집편을 본 뒤에야 TV판이 왜 일부에서 아쉽다는 평을 받았는지도 이해가 됐습니다.
Q. 아이리스 아웃은 어디서 들을 수 있나요?
A. 주요 스트리밍 플랫폼에 정식 발매되어 있습니다. 요네즈 켄시가 TV판 KICK BACK에 이어 이번에도 주제곡을 맡았고, 개봉 이후 한동안 국내 음원 차트에도 오른 곡입니다. 극장에서 처음 듣는 걸 추천드리는데, 저는 일부러 사전에 참아두고 극장에서 처음 들었더니 오프닝부터 감정이 확 끌려 들어갔습니다.
Q. 레제편 이후에 또 극장판이 나올 가능성이 있나요?
A. 현재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자객 편이 제작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레제편이 이 정도 퀄리티를 보여준 만큼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자객 편은 후지모토 타츠키 특유의 예측 불가한 전개가 핵심이라 극장판 포맷에 어떻게 담길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습니다.
Q. 원작 만화와 다른 부분이 있나요?
A. 몇 가지 연출 차이가 있습니다. 레제가 덴지의 혀를 끊어버리는 키스 묘사가 생략된 점이 대표적입니다. 반면 전투씬은 원작보다 확장되어 더 긴 분량과 높은 정보량으로 구성됐습니다. 원작의 정적인 컷을 영상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비교하며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결론
『체인소맨 레제편』은 스토리, 액션, 로맨스, OST 네 가지를 한 편 안에 갖춘 극장판입니다. 제가 세 번 본 뒤에 내린 판단은, 현재 극장에 걸린 작품 중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이 작품이 상위권이라는 것입니다. 종합 평점으로는 3.5점 정도가 적절하다고 봅니다. 전체가 고른 완성도라기보다는, 기억에 남는 장면과 음악의 밀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레제 앓이가 끝나지 않은 분이라면,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꽤 오래 걸렸습니다. 그 시간 동안 원작을 다시 읽어보면 극장판에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복선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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