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짐 캐리가 신의 능력을 손에 넣었다. 이 한 줄만으로 중학생이던 저는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배가 아플 때까지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서른이 넘어 다시 보니 웃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생겼어요. 지금까지 다섯 번쯤 본 이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기분이 가라앉을 때 꺼내 보는 영화가 됐습니다.
영화 기본 정보
제목: 브루스 올마이티 (Bruce Almighty)
개봉: 2003년
감독: 톰 새디악
출연: 짐 캐리, 모건 프리먼, 제니퍼 애니스톤, 스티브 카렐
러닝타임: 101분
나의 별점: ★ ★ ★ ★ ★
영상 출처: isthemoviegood
※ 아래에는 줄거리와 결말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생의 나를 웃게 한 그 장면
중학교 여름방학, 친구 셋이 모여서 동네 영화관에서 봤습니다. 에반이 생방송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옆에 앉은 친구가 팝콘을 쏟을 만큼 웃었고, 저도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어요. 극장을 나와서도 한참 동안 그 장면을 서로 흉내 내며 걸었습니다. 그때는 이 영화가 그냥 세상에서 제일 웃긴 영화였어요. 같은 영화를 몇 년 뒤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보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주인공 브루스는 지역 방송국에서 늘 가벼운 현장 리포트만 맡는 기자입니다. 앵커 자리를 라이벌 에반에게 빼앗기고 생방송 중에 폭발해 해고까지 당하자, 그는 신에게 원망을 쏟아내죠. 그러자 정말로 신이 나타나 말합니다. 그렇게 잘할 수 있다면 네가 한번 해보라고.
능력을 얻은 브루스가 에반의 생방송을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웃음이 납니다. 다음 장면을 다 알고 있는데도 웃게 만드는 것, 그게 짐 캐리의 타이밍이에요. 낯선 사람들과 같은 장면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지는 경험, 코미디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를 저는 이 영화로 처음 알았습니다.
짐 캐리라는 몸
마스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배우가 어떻게 얼굴 근육을 저렇게 자유롭게 쓰는지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그게 한 단계 더 나아가요. 단순히 웃긴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분노와 황당함과 신남이 한 얼굴에서 몇 초 사이에 지나갑니다. 말보다 몸이 먼저 웃기는 배우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예요.
신이 걸어둔 두 가지 규칙
신은 능력을 넘기면서 두 가지만 지키라고 합니다. 자신이 신이라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 그리고 사람의 자유의지는 건드리지 말 것. 브루스는 두 번째 규칙 앞에서 무너져요. 멀어져 가는 연인 그레이스의 마음만큼은 능력으로도 돌릴 수 없었으니까요. 처음 볼 땐 그냥 지나친 장면이었는데, 다시 보니 이 영화에서 가장 씁쓸한 장면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억지로 돌리려 할수록 오히려 멀어진다는 건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으니까요.
모든 기도에 예스라고 답하면
세상 모든 사람의 기도가 한꺼번에 들려오자 브루스는 귀찮다는 이유로 전부 들어주기로 해버립니다. 그 결과 복권 당첨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당첨금이 형편없이 쪼개지고, 도시는 혼란에 빠지죠. 웃기던 영화가 이 장면을 기점으로 따뜻한 드라마로 방향을 틉니다.
신은 브루스에게 이렇게 말해요. 수프를 가르는 건 기적이 아니라 마술일 뿐이라고. 두 가지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축구 연습에 데려다주는 엄마가 진짜 기적이라고. 그리고 덧붙입니다. 기적을 보고 싶다면, 네가 기적이 되라고. 중학생 때는 그냥 지나쳤던 이 대사가, 아이 둘을 키우는 지금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크게 들렸습니다. 브루스는 하루 만에 자기 욕심부터 채웠지만, 저는 아마 새벽에 두 아이가 동시에 깨지 않게 하는 데 쓸 것 같습니다. 세 살 딸과 두 살 아들이 번갈아 깨는 밤이 이어지면 다음 날 회사에서도 정신이 없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것도 결국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건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습니다. 기적을 바라기보다 오늘 밤 한 번 더 일어나 안아 주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기적이겠죠.
기분이 가라앉는 날의 상비약
회사에서 크게 깨진 날이나, 스스로가 싫어지는 날에 이 영화를 틀어요.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 불을 반쯤 끈 채로 보면, 다 아는 장면인데도 에반 장면에서 어김없이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브루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고 나면 이상하게 내일 아침에는 조금 더 웃으면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저에게는 일종의 상비약 같은 영화입니다.
아쉬웠던 점
다시 보니 그레이스라는 인물이 브루스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로만 쓰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레이스가 왜 브루스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는지, 그녀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는 거의 보여주지 않아요. 또 후반부의 감동적인 전개가 조금 빠르게 정리되는 면도 있어서, 브루스가 진짜로 변하는 과정을 몇 장면만 더 보여줬다면 결말이 더 설득력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웃음과 메시지의 균형은 지금 봐도 훌륭해요.
아이와 함께 봐도 될까
미국 기준 PG-13 등급이고 성인 유머가 꽤 섞여 있어서, 세 살 딸과 두 살 아들에게는 아직 한참 이릅니다. 아이들이 중학생쯤 되면 꼭 같이 보고 싶어요.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던 그 나이에, 아이들은 어느 장면에서 웃을지 궁금합니다.
마치며
브루스 올마이티는 저에게 그냥 웃긴 영화로 시작해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됐고, 지금은 힘든 날 꺼내 보는 영화가 됐습니다. 짐 캐리가 주는 즉각적인 웃음도 좋지만, 볼수록 기적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되는 거라는 메시지가 더 오래 남아요. 아직 안 보셨다면, 또는 오래전에 보고 잊으셨다면 오늘 밤 한 번 틀어보세요.
이 글을 쓰며 유튜버 무비용 님의 리뷰 영상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