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를 잘 그린다는 게 정말 재능의 문제일까요. 룩백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재능과 노력을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한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어요. 체인소 맨으로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작가를 처음 알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영화 기본 정보
제목: 룩백 (Look Back)
개봉: 2024년
감독: 오시야마 키요타카
원작: 후지모토 타츠키의 단편 만화
목소리 출연: 카와이 유미, 요시다 미즈키
러닝타임: 58분
관람 정보: 두 아이를 재운 평일 밤, 넷플릭스로
나의 별점: ★★★★★
영상 출처: MEGABOX메가박스
※ 아래부터는 결말을 포함한 중요한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칭찬에 취해 허세를 부리던 아이
초등학생 후지노는 학교 신문에 매주 네 컷 만화를 연재하는 반의 인기 작가입니다. 친구들의 칭찬을 들으며 쉽게 그린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밤새 책상 앞에 앉아 있어요. 저는 중학생 때 반에서 게임을 잘하는 애로 통했는데, 그때 당시 스타크래프트가 유행이라 엄청 연습을 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는 게임 잘하면 인기가 많은? 그런 느낌이라 잘하는 척도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의 후지노를 보면서 자랑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이 생각이 좀 났습니다.
내가 두려워한 상대가 사실은 내 팬이었다
그런 후지노 앞에 나타난 이름이 쿄모토입니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인데, 신문에 실린 쿄모토의 배경 그림은 후지노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질 만큼 압도적이었죠. 후지노는 한동안 그림을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졸업식 날, 선생님 부탁으로 쿄모토의 집에 졸업장을 전하러 간 후지노는 뜻밖의 고백을 듣습니다. 쿄모토는 처음부터 후지노 만화의 팬이었어요. 내가 두려워한 상대가 사실은 나를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빗길을 후지노가 혼자 들떠서 뛰어가는 장면은, 대사 한 줄 없이 그 기쁨을 전부 보여줍니다. 이 작품이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장면으로 보여준다는 게 무엇인지 처음 실감한 순간이었어요.
둘이 함께 그린 시간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만화를 그립니다. 후지노가 이야기와 인물을, 쿄모토가 배경을 맡아 공모전에 작품을 내고 상을 받으며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죠.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쿄모토는 그림을 더 깊이 배우고 싶다며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말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저에게는 아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연애할 때 제가 블로그를 해보고 싶다는 말을 지나가듯 했는데, 아내는 그걸 기억했다가 몇 년 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이제 써보라고 노트북을 꺼내줬어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도 아내가 두 아이를 맡아준 덕분에 생긴 시간입니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팬레터 같은 고백에 빗속을 달려가는 장면을 보며,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게 사람을 얼마나 움직이게 하는지 다시 생각했어요.
설명하지 않는 결말
시간이 흘러 연재 작가가 된 후지노에게 믿기 어려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쿄모토가 다니던 미술대학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어요. 후지노는 그날 내가 쿄모토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자책에 무너지고, 영화는 그 만약이라는 질문을 또 하나의 이야기로 조용히 펼쳐 보입니다.
쿄모토의 방 앞에서 다시 마주한 네 컷 만화 한 장이 무너진 후지노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제목 룩백에는 뒤를 돌아본다는 뜻과 함께,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던 시간이 겹쳐 있는 것처럼 읽혔어요. 결말을 알고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세 살 딸의 크레용
세 살 딸이 요즘 크레용을 쥐고 벽이며 스케치북이며 온 데를 동그라미로 채우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동그라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따지기 전에 그냥 그리는 게 좋아서 그리는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언젠가 딸이 누군가의 칭찬 때문에, 혹은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도 옆에서 가장 먼저 팬이 되어주는 아빠이고 싶습니다.
아쉬웠던 점
58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덕분에 밀도는 높았지만, 그만큼 두 사람이 함께 만화를 그리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웠습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원고를 넘기고 배경을 채우던 장면들을 조금만 더 길게 보여줬다면, 후반부의 상실감이 지금보다도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또 결말부의 갈림길 같은 장면은 처음 볼 때 현실인지 상상인지 헷갈려서, 한 번 더 돌려본 뒤에야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원작 만화와 함께 보면
원작은 웹에 처음 공개된 뒤 사건 장면의 일부 표현이 수정된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원작의 흐름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면서, 원작의 정지된 컷들 사이를 움직임과 소리로 채웠어요. 원작을 먼저 읽고 보면 그 사이의 빈칸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채워졌는지가 보이고, 영화를 먼저 보면 원작의 컷 하나하나가 더 오래 머물게 됩니다.
마치며
룩백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후지노가 쿄모토를 구했고, 쿄모토가 다시 후지노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매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였습니다. 같은 작가의 전혀 다른 얼굴이 궁금하다면 체인소 맨 레제편 후기도 함께 읽어보세요.
이 글을 쓰며 유튜버 애니야호 님의 리뷰 영상을 참고했습니다.